하나를 개선시키겠다고 마음을 먹어보자. 

어떻게 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먼저 떠올린다. 

그 언어들은 일상의 언어들이다. 

시장의 언어들, 컴퓨터 언어들은 그와 다르다. 

자신의 언어들을 다른 언어로 변환하기 위한 사고를 해야 한다.

그 사고가 연결되고 그것이 관찰로 확인되고 그것이 기록되어야 '개선'됐다고 할 수 있다. 


머릿속에 머물러 있는 생각들은 리스크도 없고 장애물도 없는 관념들이다. 

그 관념들은 세상에 나와 현실에 영향을 미칠 때까지 온갖 것과 마주친다.  

그 교환의 과정을 피할 때 그 생각들은 머리 어딘가에서 사장된다. 


그 생각들이 현실과 맞닿았을 때 정말 잘못된 생각이었는 지 판단하기도 어렵다. 

때가 잘못됐을 수도 있고 그 생각이 현재의 문제와만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문명에 사는 한 이 수많은 마주침과 평가를 피할 수 없다. 


-포인터로 머리 쓰다가 든 생각

문제는 치워 버려야 할 대상일까. 불가에선 번뇌 즉 보리라고 한다. 프로그래밍으로 치면 오류가 곧 공부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문제로 보는 게 문제다. 모르는 걸 해치워야 할 대상으로 본다. 배우고 알아가는 과정은 모르고 오로지 결과만 바라보며 살아 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배우고 여태까지 살아왔으니 문제만 보면 그렇게 반응한다. 과정의 아름다움은 모른 채 결과만으로 승패를 따진다. 성공·실패, 0-1 오로지 1비트에 온 아날로그적 과정들을 빗댄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단박에 과정형 인간이 되기는 어려울 거다. 그래도 점점 그런 쪽으로 마음을 내 봐야겠다.


2018-09-05 




2018-09-01 오후 5:06

도덕경 보다 든 생각.

겨룸은 승패를 만든다.
의지는 되고 안됨을 만든다.
하고자 함은 하지 못함을 만든다.
채움은 비움의 없음이다.

나아가면 충돌을 만든다.
얻으려면 줘야 한다.
무형의 세계를 모아서 하나의 전략을 만든다.
전략은 극대화다.
얻으려고 했으니 얻지 못함과 얻음으로 갈린다.

뭘 하기는 쉬우나 뭘 안하기는 어렵다.
안 가진 것들을 발견하기는 쉽고 가진 것들을 소중히 하기는 어렵다.
욕망의 속도는 절대 마음보다 느릴 때가 없다.
욕망과 의지는 토끼고 만족은 거북이다.

자족과 욕망.
사람들은 욕망하라고 한다. 멈춰 있으면 움직이라고 한다.
움직이는 순간부터 일이 생기기 시작한다.
일이 생기기 시작한 순간부터 성공과 실패가 따라 붙는다.
일이 생기기 시작한 순간부터 편(便)은 불편이 된다.
거기에는 '더'와 '좀 더'만 있다.

지금 있는 것은 있지 않다.
그것이 없어질 때만 그게 존재한다.
그것은 마음 속에서만 있었다.
















게임 개발 5일차를 지나가니 여러가지 힘에 부치는 일들이 나타나고 있다. 알고리즘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자꾸 알고리즘을 공부하니 무기력한 시간들을 보내게 된다. 학창시절 가장 싫어했던 삼각함수 등 도형들과 벡터들을 만난 것도 아이러니다. 공부가 아니라 정말 게임을 만드는 기술에 필요하다고 하니 대충 건너 뛸 수도 없을 듯 하다. 꽤 경력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보니 비교의식도 발동한다. 


왜 답답한가 생각해보니 역시 노력한 것보다 더 받으려는 욕심이 잔뜩 끼어 있었다. 못하는 이유는 그 전에 이와 관련된 노력을 안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와 관련된 노력들이 필요하게 됐다. 그 노력을 안하고 단계를 건너 뛰고 싶은데 안되니 화가 올라오는 거다. 참 어리석다. 


존재하지도 않는 최선들을 떠올리는 것도 스트레스만 부르고 있다. 국비지원과정 자체가 최선과는 거리가 먼 과정이다. 산업변화와 개인들의 욕구로 인해 직업 수요는 빠르게 바뀌는데  기업들이 신입을 뽑지 않으니 만든 훈련 과정이다. 태생부터가 개개인의 난이도에 따라 심도있는 수업을 할 수 없게 만들어진 제도다. 그런거 다 따지고 만들었다면 또 여기서도 진입벽이 있었을 게 뻔하다. 


삶은 끊임없이 최선같은 차선을 찾는 과정같다. 트레이딩 전략으로 치면 최선의 전략은 만들 수 없다. 최선의 삶 또한 불가능하다. 최선의 길이 최악일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이 개개인들은 최선같은 차선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어쩔 때는 차악도 선택해야 한다. 최악은 피해야 하니까. 


수많은 진력빠지는 시간들이 마음을 흔들고 있다. 글을 쓰면서 마음을 다잡아 본다. 


180831



최근 게임 프로그래밍 좀 배워보겠다고 국비지원 학원을 다니다 든 생각.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중학교 때 배웠던 삼각함수와 고등학교 수2에서 배웠던 벡터를 공부하고 있다. 유난히도 어려워했던 도형부분을 다시 하니 힘이 빠진다. 머릿속에 빠져 있는 부분들이 있는 상태에서 응용을 하려고 하니 힘이 든다. 힘이 드니 하기가 싫고 하기 싫으니 뭔가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 같다.

그리 큰 일이 아닌 것 같아 보였던 일도 이정도다. 대체 복잡하다고 하는 일들의 복잡성과 배경지식들을 얼마나 많을 것인가. 상상이 안간다. 다들 회사 나와서 고작해야 치킨집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 지식과 노하우의 복합체인 회사도 어렵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숙련성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품이 드는 지를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문명 앞에 왜소할 수 밖에 없는 시대다. 문명이 복잡해질수록 개개인에게 요구하는 것들은 늘어난다. 점점 평균으로 힘이 모이기 보다는 어느 쪽으로 쏠리는 힘이 강해지는 세상이 오는 것 같다. 문명의 복잡성과 변화의 속도가 그것을 가속화하는 건 아닐까?




지식의 착각 中

이 책의 마지막 챕터를 보면 공저자의 딸 L과 S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L은 무엇을 아는 지 모르는 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입니다. 인지과학에서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아는 능력을 '메타인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우등생들이 대부분 이 능력이 높다고 합니다. 반면 S는 주제파악을 못하는 유형입니다.(뜨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잘 구분할 줄 모릅니다. 이 책의 취지대로 이해하자면, 자신의 지식과 남의 지식을 잘 구분 못해서 착각을 하는 유형입니다.(제 에버노트 카테고리 생각하다가 또 뜨끔;)항상 머리속에서 저 너머를 생각합니다. 

전 이 부분을 보다가 기획이란 게 S와 같은 마음가짐이 아니면 나올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체 프로세스를 물 흐르듯 파악하고 그것이 세계와 조우했을 때를 정확히 알면 무엇을 만들겠다(하겠다)는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 바텀업 예측을 통해 살아 남을 만한 기획들이 몇이나 있을까요. 그리고 보통 그렇게 떠오른 것은 가장 자기가 여태까지 경험했던 것들과 비슷하고 진부한 생각일 가능성이 큽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착각이 없으면 인간에게 대부분의 시도란 게 가능한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반면 S인 사람이 L와 같은 마음을 먹거나 적어도 L과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생각이 일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어느 팀에도 일을 자꾸 벌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든 현실적으로 구현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원래 기획은 착각에서 시작된다라는 말을 쓰려 했는데 쓰다보니 조화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네요. 해당 책 읽다가 생각이 나서 끄적여 봤습니다. 


'정원의 느룹나무 위에 매미가 있었는데 매미는 날개를 비비며 울면서 맑은 이슬을 마시려 했다가 사마귀가 뒤에서 목을 굽혀오는 걸 알지 못했다. '

동탁의 폭정으로 시작됐던 삼국 드라마가 사마의의 죽음으로 끝났다. 오랜만에 삼국지를 봐서 그런 지, 삶이 전쟁처럼 퍽퍽해서 그런 지 몰라도 매우 재밌게 봤다. 손자병법 강의를 보고 봐서 그런 지 더욱 그들의 처지 하나하나가 이해됐다. 

오랜만에 다시봐도 참 허망한 결말이다. 조조-유비-손권 이라는 영웅들의 싸움은 어디가고 천하 패권은 사마의 가문이 잡았다. 장자의 당랑포선 황작재후(螳螂捕蟬 黃雀在後)고사대로다. 다들 천하통일이라는 눈 앞의 이익, 위-촉-오라는 적과 싸웠지만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있었다. 한에서 부서지고 나뉘어 다시 합쳐진다면 그 수많은 죽음들은 왜 필요했던가. 수증기가 얼음이 되는 과정처럼 덧 없어 보였다. 

@적이 뭘까. 경쟁이 뭘까. 

드라마를 다 보고 나니 적이 과연 뭘까라는 물음이 절로 올라왔다. 극중 사마의는 제갈공명덕분에 목숨을 부지한다. 만약 고도의 책략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조씨 가문에서 그를 살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적이지만 그 적이 있기에 자신의 가치와 기회가 있다. 적은 가장 조심해야할 상대지만 가장 필요한 친구이기도 하다. 

적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곱씹어 봤다. 적벽대전에서 나오는 주유는 제갈공명에게 콤플렉스를 가진다. 그래서 감정 섞인 무리한 공격을 하고 동맹을 해친다. 그를 미워하기 때문에 감정이 섞이게 되고, 감정이 섞이니 무리할 수 밖에 없다. 결국 분해서 피를 토하고 죽는다. 

반면 삼국지에서 조금이나마 큰 역할을 하는 인물들은 다 적에게서 배움을 구하는 이들이다. 조조는 모든 전투에서 적을 배우는 영웅이다. 사마의도 조조의 인내심을 배운다. 적의 강점을 배우고 적을 존경하기 때문에 더 큰 포부를 쳘칠 수 있다. 

내 삶을 되돌아보면 대부분 주유와 같이 적을 대했던 것 같다.(주유는 천재적 능력이라도 있지...)더 잘하는 이를 처음부터 적으로 보거나 열등감을 느낀다. 더 나아갈 힘을 기르지 못한다. 경쟁을 대하는 자세부터가 잘못돼 있는 것이다. 

@인욕이 큰 일의 기본. 

인욕이 큰 일의 기본이라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드라마를 보면 유비는 나이 오십이 다 돼서도 제대로 된 주둔지 하나 못 구했다고 괴로워한다. 뒤집어 말하면 그 나이까지도 뜻을 굽히지 않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마의도 그렇다. 조조가 처음 그를 의심할 때부터 조씨 집안의 왕을 세번 섬기는 동안 온갖 박해를 받을 때도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칼을 한번 휘둘렀지만 십수년간 칼을 갈았다'고 할 만 하다. 드라마를 보다보면 참지 않아서 패전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때를 알아야 한다. 
인욕을 하려면 주변상황을 기민하게 알아 채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무턱대고 참는 게 아닌 것 같다. 원술은 괜히 황제가 됐다가 제후들의 미움을 사서 몰락한다. 조조는 한황실의 몰락을 알았지만 동탁과 원술의 사례를 보고 승상에 머문다. 유방이 진시황의 몰락을 보고 각지의 지방세력을 이용한 것과 비슷한 듯 하다. 때를 모르고 덤비면 필패한다. 

@간교함을 가지되 뜻을 잃지 말아야 한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니 간교함이 어쩌면 난세를 헤쳐가는 기본적 기술이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간교함을 간파하려면 그 간교함을 넘어서는 간교함이 있어야 한다. 주역에서도 상괘에서는 예의를 따지는 게 아니라고 한다. 하괘에 가서야 예의를 따진다. 비인(非人), 사람 아닌 사람, 싸이코패스들과는 예의를 따져서는 안된다. 그들에게 인의를 다하면 재앙이 몰려온다. 

반면 뜻을 잃어서도 안되는 듯 하다. 모든 삶이 생존경쟁으로 점철돼 있는 삶이라면 얼마나 피곤한가. 뜻이 없는 삶이란 얼마나 공허한가. 마음안에 선한 뜻은 계속 품고 있어야 하는 듯 하다. 난세라지만 오히려 난세라서 그런 마음이 필요한 것 같다. 




































@간교함은 난세를 살아가는 기술인가. 난세가 낳은 기술인가. 

보통 '난세의 간웅' 조조라고 한다. 이 말에는 난세를 헤쳐나가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 간교함이란 뜻을 품고 있다. 그런데 삼국을 보니 난세의 하나의 전략이라 간교함이 필요한 게 아닌 것 같다. 난세라서 간사함을 낳을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순위를 따지자면 난세라는 환경 자체가 간사함이라는 인간의 전략을 낳았다(혹은 강요했다)고 보는 게 옳은 것 같다. 

조조는 철저히 허대신 실을 따진다. 그는 이름뿐인 천자의 자리를 넘보지 않고 승상의 자리로 천자 이상의 권세를 누린다. 극 중 사마의가 하는 말 속에 그의 됨됨이가 녹아 있다. "선왕께선 저의 모범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실속을 챙기고 어리석은 자는 허명을 다투지요. " 난세는 그야말로 혼란의 시기다. 치세가 되던 것들이 모두 무너지고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시기다. 채워진 독에서 인심난다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시기에 허를 탐할 여유가 없다. 

@난세일수록 자기 확신을 가져야 한다. 

조조는 극 내내 '세상이 오해를 하든 말든 나는 나'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권력자의 나르시시즘이기도 하지만 난세를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난세라는 건 위계가 무너진다는 이야기다. 기존 방법, 기존 시각, 기존 사업이 앞으로도 잘된다는 확신을 할 수가 없다. 높이 올랐던 것들이 무너지기만 하는 시기에 누가 미래를 이야기할 것인가. 한 인간의 가치조차도 확신할 수가 없다. 어제의 승리자가 오늘의 패배자가 되기 일쑤다. 이런 시기일수록 기존의 시각에서 맞았던 것들이 오답이 될 확률이 높다. 세상을 따라가다간 같이 무너질 확률이 높은 것이다. 자기 확신이 부족하면 흐름에 밀려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누구의 평가도 믿을 수 없다. 평가하는 이의 고정관념이 실패로 곧장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난세가 되야 기회가 생긴다. 

돗자리 장수 유비, 환관 자식 조조가 황제의 자리에 갈 수 있으려면 난세가 되야 한다. 기존 기득권(한(漢)에서 꿀빨던 인간들)들이 심하게 무너져야 기회가 생긴다. 문제는 그런 혼란 속에서 가장 약한 자들 먼저 무너진다는 것. 자신이 조조가 될 지 징집되어 그냥 죽게 된 병사 A가 될 지 알 수 없다. 난세는 모 아니면 도를 요구한다. 그 속에서 기회와 함께 위기가 생겨난다. 

@현재와 삼국
현대를 치세로 보는 사람들은 적을 것이다. 대기업 조차도 하나둘 무너져 가고 있고 공무원·몇몇 건물주 외에 내일을 확신할 수 있는 이들이 없다.  인공지능 등 기술의 발전은 너무 현란해서 그 파급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몇몇 남은 정규직·공무원 자리는 한나라 말엽 관리들의 자리와 비슷해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얻을 수 있다. 살아 있는 자들도 '의자놀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비전은 없고 과거의 영광 밖에 없는 두 세력(산업화-민주화)들이 과거를 훈고하며 정치싸움만 일삼는다. 

@치세와 난세의 인과.  
유비가 삼고초려로 헛걸음 할 때 제갈량 제자의 이야기가 인상깊었다. 그는 "자고로 치세가 있으면 난세가 있는 법. 치세와 난세는 상호보완의 관계입니다. 그 기복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하니 치세와 난세는 인과로 묶여 있습니다." 라고 한다. 난세만 계속되는 삶도 없고 치세만 계속되는 삶도 없다. 어쩌면 난세는 입장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뭔가를 가지고 그것을 앞으로도 지킬 능력이 있는 이들에게 현재는 치세다. 반면 그것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현재는 난세다. 무엇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평생이 난세다. 무엇을 얻을 이유가 없는 이들에게는 평생이 치세다. 




친박이 진박 감별하며 정치놀음을 할 때 그들의 끝이 보였다. 구 시대 세력을 등에 업고 평균과 동떨어진 행동을 일삼을 때 끝은 정해진 것이었다. 평균에서 지속해서 벗어나면 회귀하는 힘이 강력하게 작용한다. 차면 기운다. 


박정희씨 이후 역대 대통령들의 역사를 살펴보자. 최규하씨외에 본인이나 가족이 감옥을 가지 않은 경우는 없다. 현재 하는 꼴을 보니 문재인씨가 감옥갈 날이 멀지 않은 듯 하다. 또 한번 배운다.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 





박정희 -본인 사망 부인 사망 아들 감옥 딸 감옥

전두환 - 본인 감옥

노태우 - 본인 감옥

김영삼 - 아들 감옥

김대중 - 아들 감옥

노무현 - 본인 사망 형 감옥 

이명박 - 본인 감옥 

박근혜 - 본인 감옥 

문재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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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걷는 것과 같다.


서두르면 안된다.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 굳이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


마음에 욕망이 생기거든 곤궁할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본,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승리만 알고 패배를 모르면 해가 자기 몸에 미친다.


자신을 탓하되 남을 나무라지 마라.


미치치 못하는 것은 지나친 것보다 나은 것이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


풀잎 위의 이슬도 무거워지면 떨어지기 마련이다.




人の一生は重荷を負うて遠き道をゆくが如し、


いそぐべからず、


不自由を常と思へば不足なし、


こころに望おこらば、


困窮したる時を思ひ出すべし、


堪忍は無事長久の基、


いかりは敵とおもへ、


勝事ばかり知りて、


まくる事をしらざれば、


害其身にいたる、


おのれを責めて、人をせむるな、


及ばざるは過ぎたるよりもまされり




처음 읽고, 과연 전국시대를 제패한 인물이 쓴 글인가 싶었다. 언뜻 보면 대충 면피하면서 산 소심한 졸장부가 쓴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성취보다는 성취를 이루기 위해 겪어야만 했던 고통이, 자유보다는 속박이 글에 묻어 난다. 어쩌면 가장 교만할 수도 있는 인물이 '모르지기 사람이라면 분수를 알아야 한다'라고까지 한다. 그의 삶을 볼 때 '나같은 큰 인물의 삶이 따로 있으니 분수에 맞게 살아라'라고 한 말은 아닌 듯 싶다. 오히려 삶의 제약들을 통달한 체념을 말한 듯 하다.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다. 


무엇을 하기는 참 쉽다. 무엇에 반응하기는 쉽다. 세상은 끊임없이 반응을 요구하고 각자의 업식이 반응해 또 업식을 쌓아 나간다. 그게 세상과 잘 맞아 떨어지고 자기 삶이 충만하다면 그냥 살면 된다. 그러기가 어려워서 문제지...


반면 인내는 어렵다. 업식을 거스르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것. 시작할 때 끝을 보는 것. 분노와 원망이 일어날 때 자기로 돌이키는 것. 반응하지 않고 생각하는 것. 결과에 반응하지 않고 과정을 찬찬히 살피는 것. 모두 의도적 노력이 필요한 일들이다. 


울지 않는 새는 칼로 베어버린다. (오다 노부나가), 울지 않는 새는 울게 만든다(도요토미 히데요시), 울지 않는 새가 울때까지 기다린다.(도쿠가와 이에야스) . 평범한 이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상수로 치지만 결국 시대를 제패한 건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난 그동안 오다 노부나가처럼 산 듯싶다. 그러다 뭔가 안 맞는다 싶으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같이 굴었다. 그러다 다시 오다 노부나가로 돌아갔다.  나이가 든 것인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삶의 태도들을 가져봐야겠다. 땔나무 위에서 쓸개를 핥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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