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으로 자기를 숨기고 살던 엘사의 폭주. 

'Let it go' 마지막의 냉소적인 웃음은 어떤 의미일까. 

어쩌면 영화 '겨울왕국'과 예능 '나는 자연인이다'는 쌍둥이일지 모른다. 

동화속 겨울왕국 엘사는 문명 속 자연인들일 뿐. 

어쩌면 내가 지금도 짓고 앞으로도 지으려는 표정은 저것 아닐까. 

'추위는 나를 괴롭힌 적 없다' 





최근 게임 프로그래밍 직업학교를 다니다 문명의 속도와 넓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정규 대학교 과정으로 치면 반년은 족히 걸릴 내용들을 한달에 압축시켜 넣다보니 부대끼는 점이 한 둘이 아니다. 뭔가 정리되지 않고 불편한 감정들이 과정을 듣는 내내 계속되고 있다. 데드라인이 정해져 있는 학습을 하다보니 피할 수 없는 긴장감이다. 


문득 뭔가를 개발하는 동안 이런 긴장감이 언제 어느 정도까지 유지되는 지 궁금해졌다. 인디 게임 커뮤니티에 관련 글을 올렸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 "평생"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전히 모르고 정리안되는 상태가 지속된다는 얘기다. 


그 글을 보고 '참 문명이란 게 사람을 왜소하게 만드는 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뭔가를 조금이라도 사용하기 위해 습득해야할 지식들이 끊임없이 늘어난다. 세상이 변하는 만큼 어제의 개념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개념들이 나타난다. 세계가 새로 확장되는 만큼 기술의 폭과 넓이도 점차 증가하는 것이다. 


언리얼 엔진을 비롯한 엔진들이 '창작의 민주화'를 나름 이뤘다지만 그것을 쓰기 위해 익혀야 할 지식들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 수많은 개념들에 대해 익숙해지고 여러 모방들을 거쳐야 뭔가를 만들 수 있다. 그 계층적 구조는 단시간 내에 이루기 어려운 것이다. 그 어려운 것을 나를 비롯한 개발자들이 하고 있다. 어떻게 하고 있을까? 


더 쉽고 편하게 접근 가능한 지식덕분에 하고 있다. 학원을 끝나고 집에 와도 유튜브를 가면 관련 개념들과 예제들을 설명한 영상들이 넘쳐난다. 지금까지 그 지식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학원과정을 때려쳤을 것이다. 개발자들도 수없이 스터디를 조직하고 학습을 하며 문명의 속도를 따라가고 있다. 


그럼 개개인에게 요구되는 문명의 '지식 압력'(이 정도는 알고 갖추어야 한다는 요구사항)은 그렇게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지식만큼이나 얕아지고 있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게 보편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정보의 양과 능력이 커질 수록 보편적인 기대치또한 동시에 늘어난다. 통계로 내보진 않았지만 어떤 일을 기본적으로 하기 위해 요구하는 기술력의 양은 매년 늘어나고 있을 것이다. 이 속도는 기술이 팽창하는 한 줄어들 수 없다. 


"이제 선택은 둘 중 하나다. 각오하든가, 아니면 느리게 성찰하든가"


김정운 씨가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에서 직선 강박과 압축성장의 속도로 인한 부작용을 역설하면서 한 말이다. 문명의 속도를 따라가려면 각오 해야 한다. 지식은 나보다 빠르니까. 난이도는 타인이 만들어 내니까. 달리는 기차를 그나마 천천히 보려면 차를 타고 똑같은 속도로 달리는 수 밖에 없다. 다른 길도 있다. 느리게 내 속도를 지켜 나가는 일이다. 난 딱히 각오하고 싶지 않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이즈음 사람들은 누구나 잘나고 싶어하고, 누구나 출세하고 싶어하고, 누구나 예뻐지고 싶어한다. 그 원인은 뿌리깊은 자기불신이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이 재미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속마음은 대부분 사람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사람에 대해 실망을 하는 그들조차 자신을 사랑하는 일엔 등한하다. 

사람은 존재만으로도 아름답다. 

자연의 일부처럼, 세상 모두가 사철 푸르른 소나무이거나 대나무일 필요가 있겠는가. 잡목이, 풀들이 같이 어우러져 있을 때 아름다운 것 아닌가?

우리는 상처받고 상처 주는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존재만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다. 
사생아 민호, 결손가정의 수희, 날라리 미리, 건달 호철, 거짓말하는 영숙, 말 못하는 미영, 작가는 세상의 편견이 아닌, 세상의 잣대가 아닌, 오직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을 통해 인생의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인간에 대한 한없는 탐구심과 경의를 표하고 싶다. 

-굿바이 솔로 기획의도 중-


저기만 바라보는 자기불신. 

극복되어야만 하는 현재. 

초인이 되어야만 하는 낙타. 

가야만 하는 피안.

내가 부정하는 나. 

내가 안 믿는 나. 

그런 개개인들이 모여 만든 계약의 울타리들.



작가의 말을 보다가 문득 잘 살고 있는 건지 거울을 보고 싶어졌다. 























2018-09-16 오후 7:16
먼 옛날 노예 제도가 있던 시절, 주인은 자신의 모든 가사노동과 허드렛일 들을 노예에게 맡겨버리고는 사람들과 어울려 예술을 향유하고 시를 읊고 여행을 다니며 삶을 마음껏 누리며 여유롭게 지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주인은 노예 없이는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하는 등 뭐 하나 스스로 하지 못하는 무능력 상태가 되어 갑니다. 반면 노예는 계속 고되게 일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빨래의 달인, 청소의 달인, 요리의 달인이 되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입니다. 노동을 통해 직접 대상을 변화시키고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을 갖는 것이 진정 자기 삶에서 주인 되는 길이란 거죠. 주인과 노예 사이의 지배-복종 관계가 역전되면서 노예가 노동을 통해 주체가 되고 해방되는 혁명적 과정이 일어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적정소비생활/박미정 저> 중

오후에 입이 심심해서 마트에 녹차라떼를 사러갔다. 계산할 때보니 계산대 한 구역이 없어지고 거기에 '셀프 계산대'라는 것이 있었다. 계산원 아주머니가 있는 계산대가 밀려서 셀프 계산대를 가봤다. 바코드를 찍고 적립을 하고 영수증을 발급받으면 끝난다. 생각해보니 가끔씩 가는 도시락 집에서 무인 계산대라는 걸 설치해놓은 것을 봤다.  

최근 프로그래밍 공부를 하다보니 기계란 것 자체가 행동의 수학적 표현이란 걸 차츰 알게 됐다. 계산한 물건의 바코드를 입력한다 ->  카드를 꽂는다 -> 적립할 것인지 묻는다 -> 영수증을 건네준다. 란 절차적 프로그래밍으로 하나의 기계를 만들어 낸다. 각 단계는 표준화돼 있다. 프로그래밍에서 말하는 추상화를 통해서 인간의 노동이 수로 변한다. 이렇게 하나의 노동이 기계라는 노예에게 넘어간 거다. 

그럼 이 추상화의 범위는 한정돼 있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세상을 만드는 글자 코딩/ 박준석>를 보니 하드웨어부터 인간, 심지어 우주까지 비트로 설명하고 있다. 복잡성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든 노동을 일종의 알고리즘이라고 본다면 기획/회계/의료 등등 모든 작업이 모두 알고리즘화 가능한 것이다. 컴퓨터의 연산능력 증대와 추상화 능력의 확대가 이 흐름을 더 가속화시키고 있다. 수의 전성시대인 셈이다. 

그렇게 노동을 일련의 프로세스로 자동화시켜놓고 인간은 주인이 되는 것일까? 최근 궁금해진 질문이다. 답하기 어려운 문제같다. 그것보다 인간에게 인간이 필요없어진다는 점만 섬뜩하게 다가온다. 누구는 누군가의 노동에게 기대어 살고 있고 돈을 매개로 노동을 사고 파는 것이 자본주의의 기본이다. 그런데 노동은 필요치 않고 감가상각만 되는 기계가 필요이상(쓰다보니 필요이상이란 건 누가 정해놓는 건가 싶지만)으로 많아지는 것이다. 돈만 있으면 이제 노동 자체를 모두 기계에게 아웃소싱해도 되든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돈만 있다면'도 큰 문제지만.
   
일본에서는 늙은 중년 남자들을 '누레 오치파(젖은 낙엽)'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동안 돈 벌어 오며 가사 노동은 부인에게 아웃소싱해 오던 남편들을 지칭한다. 배경이 가정으로 바뀐 상황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가사 노동 자체를 할 줄 모르니 젖은 낙엽처럼 쓸모가 없다. 요즘은 가사노동 자체도 상당부분 상품으로 바뀌거나(반조리 식품) 기계가 하고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초 노동조차 잘 안하고 산다. 그게 문명이고 그게 편리고 그게 자유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다. 반면 일에 대한 강박은 돈 자체의 그것을 넘어서 있다. 

이스라엘 출신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최근 나온 그의 책에서 우리의 일을 대신해줄 인공지능이 다가온다며 다음과 같은 섬뜩한 이야기를 던집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착취로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나쁜 지경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무관함(irrelevance, 사회에서 관련성이 사라지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함)이다.” 
-[송길영의 빅데이터, 세상을 읽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中

기계와 살면서 자신이 누리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미래도 젖은 낙엽 신세아닐까? 노예 부려먹고 향락에 빠지다 망해버린 로마처럼 인류가 기계의 노예가 되가는 것 아닌가. 최근 인공지능 발달하는 것을 보면 놀라움을 넘어 두려워 진다. 새로운 질문이 필요한 시기같다. 나에게도 사회에게도. 


그러니까 내가 부처님을 가지고 보면 부처님이 보이는 거에요. 돼지 마음을 가지고 딱 보면 돼지로 보이는 거에요. 사랑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애인을 볼 때 사랑스럽게 보이지. 내가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보는데 사랑스럽게 보입니까.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이게 자업자득이거든요. 
서구 근대 사조는 그렇지 않아요.나와 별개로 세상이 존재한다. 이게 기계론이고, 이게 과학론이거든요. 그것가지고 안된다는 거에요. 그런거를 받아 들여서 문학도 하고 역사도 하고 철학도 하니까 인문학이 대학에서 죽어가고 있어요. 그런 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인생을 소외시켜버렸기 때문에. 예를 들어 공자의 사상을 연구한다고 하면, 공자의 인과 의를 내 인격으로 성장시킬 생각은 꿈에도 없고 그걸 책으로 연구하고 자기는 별개인 거에요. 그러고 오늘 아침 신문에 난 이야기인데요. 참선을 연구해서 박사학위 받은 사람이 참선은 한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많다. 이게 인문학의 현주소라는 거죠. 

종범 스님의 향기 있는 법문 4 - 신심과 행원 중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란 책 제목을 보고 씁쓸했다. 이게 출판시장을 뒤흔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 지식 사회의 얕은 수준을 절감했다. 지식이 내 문제를 풀기 위한 게 아니라 대화와 과시를 위한 수단이 돼있다. '뇌가 섹시해보이기' 위해서 자기 시간을 지식을 입력하는데 쓴다. 검색하면 5분이면 나오는 지식을 자기 머릿속에 넣고 있다고 철학자가 되고 역사가가 되는가. 지식의 이동통로밖에 안되는 그 인격이 무슨 깊이를 가지고 무슨 자존을 가지겠는가. 



'충북 옥천에서 일가족 4명 사망...40대 가장 중태'

오늘 읽은 기사다. 학원을 운영하다 빚에 시달리던 가장이 딸 셋과 부인을 살해하고 자해했단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는 너무 많아서 기사로도 나오지 않는다. 지금 내가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이들이 있을 거다. 

춘추전국시대(전국이 戰國인 것을 이 책을 읽다 알았다)의 참상을 묘사한 글 중에 '우물가에 사람들의 시체가 가득했다'는 내용이 있다. 한국의 건물에는 시체가 떠다니지 않는다. 시체를 바로 바로 치우기 때문이다. 문명은 죽음을 지우지만 죽음은 여기저기 떠다니고 있다. 모양만 바뀌었을 뿐 춘추전국시대는 계속되고 있다. 

이런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에 춘추전국시대 사상가들은 어떤 비전을 내세웠을까. <노자의 인생 강의 : 각자도생의 시대에서 찾은 환대와 공존의 길>은 그 참혹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사상가들의 생각, 특히 노자의 비전을 다뤘다. 

법가는 부국강병을 주장했다. 오늘날로 치면 직업 경쟁력을 키우고 재테크에서 알파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자는 주장이다. 언뜻보면 가장 '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는 방법이다. 지 몸뚱아리 노동력이든, 매출이든 뭘 팔기 위해선 죽어라 노력하란다. 각종 자기계발서의 원형과도 같다. 

일견 타당해 보이고 삶의 진실처럼 보이는 방법이지만 한계가 뚜렷하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피할 수가 없다. 70억 분의 1인 '나'가 끊임없이 도태되지 않도록 힘을 키우고 있으니 얼마나 피로한 일인가. 조금이라도 경쟁력이 약해질 때(자본주의로 치면 팔 것이 없을 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70억명과의 싸움에서 내가 졌기 때문이다. 이긴 자는 질까봐 두려워하고 진자는 패배감을 씻을 수 없다. 

유가는 인자무적(仁者無敵)을 주장했다. 맹자의 말이다.“왕은 어찌 반드시 이(利)를 말합니까? 또한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왕이 말씀하시되 ‘무엇으로써(어떻게 하여야) 내 나라를 이롭게 할 것인가?’ 하며, 대부는 말하되 ‘무엇으로써 나의 집을 이롭게 할 것인가?’ 하며, 선비와 모든 사람들은 말하되 ‘무엇으로써 나의 몸을 이롭게 할 것인가?’ 하여 상하 사람이 서로 이(利)를 가지고 싸우면 곧 이 나라가 위태할 것입니다.”(http://www.seelotus.com/gojeon/bi-munhak/cheol-hak-book/maeng-ja.htm)

법가들처럼 이(利)를 주장하면 개별주체의 피튀기는 전쟁밖에 없으니 인과 의로 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유가의 주장은 법가보다는 '자아'에서 벗어났다. 개별 자아에서 벗어나 인과 의, 사랑을 통해 너를 인정하는 방향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또한 이항대립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게 노자의 생각이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의 정명론, 인과 의라는 가치는 하나의 완벽한 이상과 기준을 만들어 낸다. 플라톤으로 치면 이데아이고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정해져 있는 보편적인 인간상이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위의 가장도 그 '보편적 가정상'을 한 때는 지키고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무너진 순간 자신과 가족을 모두 해치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전혀 있지도 않은 허구의 상이 현실의 삶을 제거했다. (살인과 자살의 매커니즘은 동일하다.) 

노자는 앞의 두가지에서 모두 벗어나자고 호소한다.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고 이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이름이 아니다. 인이니 의니 꼴지우는 순간 인과 의가 무너진다. 완벽을 정한 순간 이미 완벽한 개별 인간들이 불완전한 인간이 된다. 방향을 정한 순간 방향 아닌 것들은 모두 오답이 된다. 그 모든 인위적 -작위적 개념들이 설치는 한 살육의 현장이 모습만 달리해서 나타날 거란 말이다. 

노자가 제시한 해답은 소국과민(小國寡民), 무위(無爲)다. 돈이든 인의든, 예든 어떤 만들어 낸 가치를 향하지 않고 물 흐르듯 살아나가자는 거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물은 인연따라 얼음도 되고 수증기도 되고 냇물도 되고 바다도 된다. 담긴 그릇에 따라 모습도 수시로 바꾼다. 상대성을 다 보니 어느 것 하나를 나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렇게 작은 것들, 다양한 것들을 전부 포용해서 모든 것을 정답으로 보자는 거다. 모든 꽃이 자기의 삶을 긍정하며 만개하는 화엄세계를 떠오르게 하는 비전이다. 

모두가 원심력으로 달려가고 부국강병하면 나는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어쩌면 법가적 삶일 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인생은 오답의 연속이자 고통의 연속이다.(stay hungry stay foolish 해야 하고 끊임없이 A에서 A'로 가야 하므로 ) 실패는 파멸이며 일상은 생존투쟁이 된다. 

생활은 생존투쟁이 아니다. 너는 적이 아니다. 나라는 것을, 어떤 정답을 부여잡을 때 모두가 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환대와 공존의 대상이 적으로 보이는 전도몽상(顚倒夢想)을 실재라고 착각한다. 패배했을 때는 가차없이 자신을 제거한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모두가 원심력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얻어봤자 생로병사인 그 길을 모두가 정답이라며 좇고 있다. 나 또한 그 톱니바퀴를 돌리고 있는 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만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원심력으로 얻는 자유가 아닌 구심력으로 얻는 자유. 하나의 큰 정답이 아니라 조깨진 여러개의 정답이 공존하는 세상. 인의로 만들어 낸 코딱지만한 자유가 아니라 대자유의 길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 자유를 믿는 개개인들(聖人)이 늘어날 때라야 이 춘추전국시대의 살육이 멈출 거라고 믿는다. 

20180826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 등이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설령 그들이 슬픔의 군중이거나

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고

가구들을 몽땅 내가더라도

그렇다 해도 각각의 손님들을 존중하라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를 청소하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후회

그들을 문에서 웃으며 맞으라

그리고 그들을 집 안으로 초대하라

누가 들어오든 감사하게 여기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까

-잘랄루딘 루미 <여인숙> (류시화 옮김)


갑자기 '졸라' 지루해졌다. MS 프로젝트에 쌓여 있는 해야할 일들이 수백가지요. 기획한 것들 현실로 바꾸려면 수년이 걸려도 모자라는 것 안다. 아귀(餓鬼)같은 욕망은 계속 껄떡거리고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지루하다. 저기 수풀 속에 불안이 숨어 있을 것 같은데 바로 앞에 지루함이랑 만난 것 같은 느낌이다. 정말 그지같다. 


쇼펜하우어란 우을증 환자가 말했다. 인생이 욕망과 권태 사이에 움직이는 시계추라고. 내 삶을 되돌아 봐도 그 시계추가 매번 어지럽게 돌아 다녔다. 어릴 때는 불안을 없애보려고 별의별 난리 부르스를 쳤다. (지금도 그 불안을 벗어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불안하다가 좀 지나면 지루해지고, 지루해지다가 자기도 모르게 불안으로 이끌려 갔다. 


인지심리학에선 불안할 때 회피동기가 발동한다고 한다. 통장잔고가 줄기 시작하면 있지도 않은 생존 본능이 나타나서 이 상태를 회피하려고 한다. (잡생각 많으면 며칠 그냥 굶어라.)그렇게 회피하고 '파란 나라'가 오면 좋겠으나 그런 나라는 없(었)다. 바로 다른 불안을 찾거나 권태로 빠진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화란 것도 권태와 불안 좀 이겨보려 만들어 놓은 것들인 듯 하다. 


지루하다보니 왜 이 지랄인가 싶어 지루함에 대한 책을 빌렸다. 제목이 <당신은 지루함이 필요하다>다. 지루해서 짜증나는데 뭐가 필요하단 소린가 싶어 읽었다. 저자는 지루함이 필요한 거고, 지루함을 벗어 나려고 파괴적인 행동 혹은 소비를 하는 게 오히려 문제란다. 지루함이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라며 오히려 지루함이 주는 메시지를 들어 보라고 조언했다. '지루함의 공간에서 마주하는 부정적인 메시지의 기저에 어떤 가정이 깔려 있는 지 이해'하란다. 일부러 하는 명상보다 그냥 오는 지루함 마주하는 게 더 좋단다. 


난 지루할 때 뭘 할까. 책을 '본다'. 혹은 유튜브 동영상을 '본다'. 어쨌든 뭘로 채운다. 그 지루함을 벗어나서 빠르게 다른 어딘가로 향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게 좋은 건지 내가 원한 건지 따위는 중요치 않다. 그냥 일단 덮으면 된다. 불안을 일로 덮듯, 지루함을 다른 어떤 행위로 덮는 거다. 그런다고 딱히 뭐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그냥 매번 감정을 대하는 전략이 그랬던 것이다. 비어서 그릇이 되는 건데 매번 비어 있는 구멍을 메워 냈다. 


뭔가 이건 어리석은 것 같다. 일단 지루함이든 불안함이든 감정에다가 매번 딱지를 붙여 놓고 있다. 지루함도 나쁜 놈,,불안함도 나쁜 놈이다. 거의 인생의 대부분을 나쁜 놈들이랑 사니 인생이 고달픈 거다. 일체유의법(一切有爲法), 여포관如泡觀: 감수법 여포 응작여시관. 감정이란 물거품 같아서 믿을 수가 없다. 잠깐 인연따라 손님처럼 왔다가 손님처럼 가는 놈들인데 맨날 보면 기함을 하니 피곤할 수 밖에. 


김기태 선생의 도덕경 강의를 들으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게 있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상처든 뭐든 그것을 보낼 생각 말고 오롯히 느끼라는 것. 그냥 '그것'이고 그것이 공간이고 그것이 의미일 수 있는데, 온갖 지 자의식으로 감정에다 빨간 파란 딱지를 붙이지 말라는 거다. 그 놈이 지루해서 옘병을 하든 불안해서 옘병을 하든 자아를 내려 놓고 손님 맞이를 하란 얘기다. 


지루한 손님이 왔다. 언제 갈 지 모르지만 잠시 손님과 지지고 볶고 살란다. 손님따라가거나 손님 문전박대하면 천길 낭떠러지요. 대접하면 좋은 공부거리다. 








자기 객관화의 어려움 - 시대를 읽은 유방과 자기 앞날을 모른 한신


2018-03-24 오후 9:16

유방은 알아요. 역사발전 추세는 계급의 이동은 중앙집권관료형으로 간다. 그런데 진시황이 망하는 걸 보니까 아직 지방은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품고 가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래서 유방은 군현제와 다르게 군국제라는 통치시스템을 만들어요. 군국제는 뭐냐. 군현제하고 봉국제를 합친 연합체제. 

자 군국제를 유방이 했다. 그러면 유방의 꿈은 군현제 방향으로 가는 거에요. 봉국제로 가는 거에요. 군현제죠. 군현제로 가는데 유방 머릿속에는 군현제로 가는데 봉국제를 품고 있죠. 군현제로 가기 위해서는 자기가 품고 있던 지방분권 세력들을 어떻게 해야겠어요. 다 처단해야 겠죠. 다 죽여야 돼요. 

역사는 이런 것이다라고 할 지 몰라도 자기 일이 됐을 때 땅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 한신 회남왕 주발 이 사람들 다 죽죠. 그래요. 다른 것을 볼 때는 아 역사는 그렇지 하지만 그 역사 속에 자기가 들어 있을 때는 그걸 못 느끼거든요. 그렇게 자기를 객관화하기가 어려운 거에요. 

[EBS 인문학특강] 최진석교수의 현대철학자 노자 제12강 중


강의를 들으면서 두 가지가 눈에 띄었다. 다음 시대를 읽은 유방과 한치 앞을 보지 못한 한신. 

유방은 그 시대 정신으로 가는 것을 자신이 가진 자원가지고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장량의 충고를 받아 들여 지방세력들을 통합시켜 천하를 취한다. 자기가 생각한 이상은 중앙집권이었지만 현재 기득권들을 품으면서 그 앞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중간단계를 지나간 것이다. 유방에게는 군국제가 자기 최종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럼 그대로 군국제로 살아가는가. 아니다. 너무 많은 것들로 쪼개진 권력 분산이 춘추천국시대의 혼란을 가져왔음을 알고 있었다. 그 권력들을 남겨 놓는 순간 전쟁은 계속될 것이란 걸 알았다. 그래서 자기 꿈을 이루게 해준 권력들부터 제거한 것이다. 

반면 한신, 회남왕, 주발은 자신들의 앞날을 바로보지 못했다. 그 시대정신과 권력자의 욕망을 알았다면 장량처럼 부리나케 도망갔어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권력과 승리의 단꿈에 취해있었을 지도 모른다. 

자기객관화. 세상의 흐름을 읽고 그것을 크게 거스르지 않는 것. 말은 쉽지만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역사는 지나간 차트처럼 명확해보이고 인과 관계들도 잘 보인다. 그 역사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평론가-타인처럼 바라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보기도 쉽다. 

반면 자신이 주인공일 때는 감정이 개입된다. 감정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평론가로서의 날카로움은 사라지고 자기식의 시각이 진리인양 
착각한다. 결국 역사의 칼날에 목이 잘린다.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는 유방인가 장량인가 한신인가. 



















2018-03-24 오후 1:03

극기복례. 개별적인 내가 자기의 개별성을 누르고 보편적 이념을 따름.

어느 순간 공부를 끊어야 한다는 말의 의미
개념과 기준은 다른 어딘가에 있는 것.
개념과 기준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것. 
개념과 기준은 폭력적인 것. 

남이 만들어 놓은 지식은 논리적이다.  
이념-개념은 논리적이다. 이념은 객관적이다. 그 바탕을 이루는 말들도 겹겹히 쌓여 있다. 그것은 남의 사건들로 만들어졌다. 그것들이 공동에도 통한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이 오늘날에 공동으로 통하는 것은 둘째치고, 그것이 나에게 맞는 건 지는 알 수 없다. 

내가 마주해야 하는 것들은 오직 사건들뿐이다. 개념으로 묶을 수 없는 사건들이다. 이미 있는 개념으로 나의 사건이 설명되고 내게 충분히 쓸모 있을 때는 그것을 수용할 수 있다. 
그것이 나의 행복을 향상시키고 기쁨을 향상시키는 지식일 때 그 도구를 잠시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지식과 기준들은 그렇지 않다. 너무 견고하게 박혀 있어서 나보고 여기에 맞추라고 한다. 게다가 도구들인 주제에 개별적 존재를 넘어선 가치가 있는 것처럼 굴기까지 한다. 

그럼 처음 만들어졌을 때도 그랬을까? 그 지식과 개념들은 시대적 문제, 즉 개별적 사건을 풀기 위해서 나왔다. 그 개별적 사건을 풀고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지식과 개념을 준비한 것이다. 그것이 나올 때는 투박한 것이었고 투박한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었다. 

그랬던 것들이 세련미를 갖추기 시작하면서 인간을 넘어서기 시작한다. 자본주의란 생각, 돈이란 것들이 그들이 갖춘 도구성을 넘어서 인간위에 군림하기 시작한다. 공동체에서 서로 최대한 자유롭게 살자고 만들어 놓은 것들이 개별인간들의 자유를 훼손하기 시작한다. 세상을 온통 참아야 하고 지켜야할 것(克己復禮)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럼 현대인들이 그 기준 속에서 자유롭게 살 수가 있는가. 없다. 그 기준에 대한 회의만 더 커진다. 그 기준을 바탕으로 살아서 기득(旣得)한 이들만 행복(사실은 그들조차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다.)하다. 산업화 세력은 산업화 세력대로 민주화세력은 민주화 세력대로 자신들을 기준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세상을 담을 비전도 능력도 없으면서 어제의 기억과 어제의 가치와 어제의 기준으로 오늘을 설명한다. 

그럼 거기에 맞지 않게 살아갈 용기는 있는가. 여기부터가 진짜 문제다. 앞의 이야기들. 불만쟁이가 되는 것은 글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 비판도 논리적이고 세련돼 있다. 반면 여기서부터는 행동과 실천을 요구한다. 나 자체가 정답으로 우뚝 서야 한다. (어쩌면 개별 개개인 자체가 정답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나 자체가 그들의 답을 뚫어낼 고민으로 운동해야 한다. 이건 투박한 일이고 유치한 일이고 스스로도 믿기 어려운 일이고 귀찮은 일이다. 따라하는 것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Ufvf7TYVK54





질문자가 말했다. '희망도 세력된 욕망아닌가? 욕망이 사라지면 무기력증이 걸리는 것은 아닌가? 역사를 봐도 욕망을 가진 국가가 더 선진 발전하지 않았나. 

스님이 말했다. 그것이 좋아 보이는 것은 지금의 기준으로 그것을 보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이 50년 후 종말을 고해갈 때 역사는 지금을 욕망의 역사라고 평가할 것이다. 욕망은 왜 가지는가? 욕망은 이득을 보기 위해 가진다. 그런데 욕망이 오히려 자신을 망치는 경우를 숱하게 목격할 수 있다. 욕망이 적으면 적을수록 인간의 심리는 편해진다. 행복은 심리적 안정이다. 

스님이 이어서 말했다. 부처님은 왕궁에 병사를 두고서도 편하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반면 출가해서는 동굴에서도 편하게 잠을 이뤘다. 둘 가운데 어떤 것이 행복한 삶인가? 

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안정되면서도 도전하는 삶. 적당히 불안하면서도 적당히 권태로운 삶. 내 욕망 자체가 실현되는 삶을 욕망한다. 

그럼 그 욕망이 다 이뤄질 수 있나? 그렇지 않다. 세상의 자원은 한정돼 있다. 나의 능력도 한정돼 있다. 욕망은 무한하지만 자원은 유한하다. 의지조차도 자원과 같은 것이다. 만들고 싶다고 만들어 지는 것도 아니고 더 하고 싶다고 더 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삶은 계속해서 안되는 것 투성이일 수 밖에 없다. 고통을 피하려 해도 피할 수가 없다.

우린 욕망하고 그 욕망을 실현하는 삶이 옳다고 교육받고 살아 왔다. 태어남 자체도 남자와 여자의 욕망을 실현을 통해서 태어 났다. 그래서 끊임없이 욕망하고 또 욕망한다. 죽을 때까지 멈추지 못한다. 그 욕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한 욕망과 자절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하고 싶다. 흩어져 있는 정보를 모으고 만들고 싶은 상태를 만들고 싶다. 미몽의 상태에서 벗어나 이치를 행하고 싶다. 그런데 이 욕망들이 모여서 나에게 좌절감을 준다. 욕심을 부리다가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된다. 아직 갖추어야 할 것들을 다 갖추지 않고 무엇을 행하다가 나에게 손해가는 어리석은 짓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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