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열자는 자기가 아직 배움을 시작조차 못했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 삼 년간 두문불출하고, 아내를 위해 밥도 짓고, 돼지도 사람 대접하듯 먹이고, 세상일에 좋고 싫고를 구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깎고 다듬는 일을 버리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로 돌아갔습니다. 흙덩어리처럼 홀로 그 형체만으로 서서, 여러가지 엉킴이 있어도 그는 봉한 것 같은 상태였습니다. 이처럼 한결 같은 삶을 살다가 일생을 마쳤습니다.


<오강남 해설>

아직 배움을 시작하지도 못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는 사실 자체가 배움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열자는 이제 요상스런 신통력에 홀리지 않고 참된 도의 길에 들어서서 실상을 찾는 공부에 전념하게 된 것이다.말하자면, 무속(巫俗)의 경지를 넘어서게 된 것이다.

거기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아내를 위해 밥을 짓고, 돼지를 사람처럼 대접하고, 좋고 싫은 일이 따로 없게 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열자가 이제 남녀를 구분하고, 인간과 동물을 차별하고,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ㅇ르 가르는 일체의 이분법(二分法)적 세계관을 초월했다는 뜻이다. 성 차별을 반대하는 여성 해방 운동, 잉ㄴ종뿐만 아니라 모든 종(鍾)의 차별을 넘어서는 동물 애호 운동, 계급 차별을 없애려는 평등 운동이나 인권 운동 등은 근본적으로 이런 이분법적 의식(意識)을 초월한 깊은 안목과 통찰에서 우러난다는 뜻이 아닌가?


이제 열자는 "깎고 다듬는" 인위(人爲)의 세계에서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다듬지 않은 통나무' '박(樸)'의 세계로 넘어갔다. '박'은 도덕경에서 계속 도(道)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쪼개거나 다듬지 않은 통나무는 도와 하나됨으로 원초적 비이분의 세계를 되찾았음을 상징한다. 흙덩이처럼 우뚝 선 모습이란 앞 5:23에서 말한 것 같이 일상적인 의식이나 분별심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무심(無心), 무정(無情)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이렇게 한결같이 일생을 보낸 열자의 이야기가 [소요유](1:7)에서 "바람을 타고 올라가 마음대로 노닐고....... 세상의 행복에 연연하지 않고 초연히 노닐었다."고 나와 있다. 바람을 타고 나는 붕(鵬)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야기를 [응제왕]편에 실었을까? 지도자가 되려면 적어도 무당의 괴력에 혹하지 않는 열자와 같은 경지에 이르러야 된다는 얘기가 아닌가?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선거 때만 되면 무당이나 점쟁이들 집 앞에 성시를 이루는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아!


장자 / 오강남 풀이 / 현암사 / 무당 계함과 열자와 그의 스승 호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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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흉이란 구분. 남녀라는 구분. 인간과 짐승이라는 구분. 좋고 나쁨이라는 구분. 문명이 덧칠하는 온갖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뒤 얻는 자유의 모습. 

글을 읽다가 왜 '답답함' 속에 빠져 있는지를 알게 됐다. 하루 종일 좋고 나쁨, 유용성을 따지니 어찌 답답하지 않을 수 있을까. 구분되기 이전을 통찰하면서 얻는 자유. '아'와 '어'가 그리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난 뒤 얻는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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